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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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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때로 낯설지 않은 곳이 없다" <페르세폴리스>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9

"때로 낯설지 않은 곳이 없다"

[철학자의 서재] <페르세폴리스>

기사입력 2008-11-08 오전 10:30:55


아이들 덕분에
  
  내 책장 절반은 그림책과 동화책이 차지하고 있다. 만화책이 차지하는 자리도 제법 되는데, 책장 모양새가 이리 된 것은 아이들 덕분이다. 나는 어린 아이들과 책을 보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해왔다, 지난해까지는. 그 꼬마들이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됐다. 중·고등학생이 된 아이들과는 제법 묵직한 책을 보며 함께 세상을 논하기도 했다.
  
  자식 나이와 상관없이, 요즘 애들은 만화책만 붙든다고 많은 부모가 걱정하곤 했다. 내 아이가 책을 읽길 간절히 바라지만 만화책은 안 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충분히 이해는 된다. 누가 심어준 건지는 몰라도 '만화책은 저속하고 유치하니 그걸 읽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논리가 내 과거 한 칸에도 떡하니 있다. '깊고 아름다운 심성을 기르려면 책을 봐야지 만화책은 안 된다.'
  
  나 이가 들면서 이런 논리가 다채로운 우리 삶의 가지를 얼마나 무참히 잘라내는지를 조금은 배웠다. 걱정을 털어놓는 부모들과 마주앉아,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로 가는 데는 우리도 다 가늠할 수 없이 많은 길이 있는 게 분명하며 만화책도 얼마든지 아이에게 길을 내줄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내 얘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가 한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다니엘 페나크는 아이가 책 읽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런 독서 권리를 허용하라고 주장한다.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다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같은 것들. 그리고 심지어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책을 읽지 않을 권리!' 아이들이 책을 붙들게 해야 하는 내 의무와는 모순되게도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얘기할 때는 늘 내가 먼저 신이 났다.
  
  하지만 부모들에게 얘기하고 돌아와서는 내심 좀 바빠졌다. 좋은 만화책이 있다는 걸 (이렇게 말하려니 조심스럽다. 다니엘 페나크가 "저런, 쯧쯧." 혀를 차며 나를 걱정스레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입증해야 했으니까. 조금 뒤지기 시작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만화책에 빠진 아이들과 부모 걱정 덕분에 나는 여기저기 숨어 있던 좋은 만화책을 참 많이 봤다. <페르세폴리스>(전2권,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최주현 옮김, 새만화책 펴냄)도 그렇게 만났다.
  
  파란 많은 역사 한 자락에 마르잔이 있다
  

▲ <페르세폴리스>(전2권,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최주현 옮김, 새만화책 펴냄). ⓒ프레시안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 마르잔 사트라피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겪은 삶을 그리고 쓴 자전적인 이야기다. 여느 소설 못지않은 분량과 깊이를 지녀서 이런 책을 '그림 소설(graphic novel)'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몇 장면은 그림만으로도 우리 문학적 감성을 아주 섬세하게 자극해서 놀라게 된다.
  
  첫 책에서 우리는 마르잔이 꼬맹이에서 14살 소녀가 되기까지 이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서 그녀는 무얼 겪고 무슨 생각을 하며 자랐는지를 보게 된다. 두 번째 책에선 이란을 떠나 유럽에서 낯선 문화에 부대끼며 성장통을 겪다가 다시 이란으로 돌아와 20대로 접어드는 마르잔을 만난다.
  
  그렇다, 마르잔이 건네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이 사회와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1979년, 마르잔이 아홉 살 때 이란에서는 왕정이 끝나고 '이슬람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공화국이 들어선다. 근대로 가는 큰 변화가 있던 걸로만 치면 '혁명'이라 부를 만도 하지만, 변화 흐름을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에 주도권을 빼앗긴 그야말로 '반혁명'.
  
  여자들은 안 쓰던 헤자브를 다시 써야 하고, 혁명 수호대는 거리를 누비며 이슬람 율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두고 처벌하려 든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원하던 사회 운동가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던 시기기도 하다. 이란 내부 변화만으로도 혼란스럽던 1980년, 이라크 침공으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런 시간, 공간에 마르잔이 있다.
  
  마르잔 부모는 자기 딸이 '가까이서 힘든 것보다는 멀리서 행복한' 쪽을 선택해, 14살 어린 마르잔을 유럽으로 보낸다. 전쟁, 비민주적인 사회 분위기, 억압적인 교육 환경에서 자유로운 곳. 하지만 부모 기대대로 마르잔이 좋은 것들만 마주하기에는 너무 다르고 낯선 땅이기도 하다. 방황과 적응 사이를 오가던 마르잔은 실연의 아픔을 겪고 오스트리아 거리를 떠도는 밑바닥 삶까지 내려간 뒤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이야기 줄기를 잡고 보니 꽤 무거운 느낌이다. 이슬람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볼 때는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가 그대로 떠오르는데 그러고 보니 시기도 우리와 비슷하다. 어릴 때 세계사를 보면서, 하는 행동이나 벌이는 일이 비슷하고 그걸 처리하는 과정도 아주 닮은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멀리, 다른 시간에 살면서 똑같은 욕심을 품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리도 많을까?
  
  그렇게 어렴풋이 '보편성'이란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젊은 시절 우리나라와 마르잔이 자라던 이란은 비슷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익이 되는 곳이면 어디나 끼어들고 조작하는 제국주의자들,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기꺼이 배반할 준비가 돼 있는 독재자, 좌절하고 때로 소리도 없이 죽어가면서 끝끝내 이어지는 진보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과 싸움 같은 것.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책의 큰 흐름을 보면 무겁고 칙칙한 듯해도 실제로는 책을 읽는 동안 자주 웃게 된다. 때로는 코끝이 자극받는 걸로 시작해서 마음 어딘가가 촉촉해지는 느낌. 역사와 정치같이 큰 이야기는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 삶에서 자연스레 스며 나오다. 그 가운데 우리가 더 많이 만나는 건 바로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다니 참 좋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아이건 어른이건 이런 사람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반가운 소식을 마주한 듯 즐거워진다. 마르잔과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런 느낌을 선사받는다.
  
  누구보다도 마르잔 부모와 할머니는 쉬지 않고 그녀 삶에 뛰어 들어와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들이 참 아름답다. 건강한 의식과 열린 마음으로 자식과 세상을 대하는 마르잔 부모, 자존심과 재치와 지혜가 삶에 배어 있는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이 자라는 데 가장 섬세하고 효과적인 교육 자료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어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마르잔 부모는 잠시 터키로 여행을 가면서 마르잔에게 원하는 선물을 물어본다. 이란에서는 구하기 힘든 외국 가수 포스터 두 장.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딸이 원하는 포스터부터 구했지만 워낙 커서 까다로운 이란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 궁리 끝에 아빠 코트 등판의 안감을 다 뜯어내고 거기에 포스터를 잘 펴서 넣은 뒤 다시 꿰맨다. 커다란 포스터가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채 아빠 코트에서 나올 때 마르잔의 기쁨이란! 이런 부모다.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원하고 생각하는 작은 것도 함께 소중히 여기는 어른.
  
  마르잔 할머니는 매일 아침, 자스민 꽃을 따서 속옷에 넣는데 덕분에 늘 향기로운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 인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더 그윽하고 깊다. 유럽으로 떠나는 마르잔에게 할머니는 이야기한다. 앞으로 많은 남자들을 만날 텐데 상처를 주는 남자가 있다면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라 생각하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남자들의 잔인함에 대응하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야. 상대를 비꼬고 복수하는 것만큼 나쁜 건 없으니까".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던가, 인류가 가장 공평하게 나눠가진 천성이 있다면 그건 바로 '어리석음'일지 모른다고. 그는 어리석음에 맞닥뜨렸을 때 어리석지 않게 대처하는 길을 웃음과 관련해서 찾았던 것 같다
  
  에 코의 말도 마르잔 할머니 말도 내겐 쉽지 않다. 그런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에코가 생각났고 할머니와 에코가 만나면 이야기 상대가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둘이 만난다면 꼭 옆에 껴서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까지 들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 남자를 만날 때 내 진지함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도 할머니는 나로선 쉬이 넘어갈 수 없는 말씀을 또 이어간다.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
  
▲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출신 마르잔 사트라피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겪은 삶을 그리고 쓴 자전적인 이야기다. ⓒ프레시안

  자 기 자신과 마주하는 법,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길을 배워가는 시절에 이런 지혜로운 생각을 들려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그래서 <페르세폴리스> 이후 마르잔의 삶이 궁금하기는 해도 걱정은 안 된다. 그리고 나쁜 예를 통해서도 보편을 보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사례가 됨직한 마르잔 가족을 통해서도 보편을 확인하게 된다.
  
  격동하는 역사로 들어서기 몇 해 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어린 시절의 마르잔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여섯 살 마르잔은 예수나 마호메트의 뒤를 이은 '마지막 선지자'가 되는 게 꿈이다. 부처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던가. 어린 마르잔도 그녀 눈이 미치는 세상 곳곳에서 고통과 차별을 본다. 이를테면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가정부, 남들과는 다르게 커다란 케딜락을 타고 다니는 아빠. 그리고 오랫동안 무릎 아픈 할머니도 신경이 쓰인다. 이런 고통을 해결하는 선지자가 되기 위해 마르잔은 자기만의 경전을 만든다.
  
  "모든 사람이 차를 가져야 한다. 모든 가정부는 주인과 한 상에서 식사해야 한다. 어떤 노인도 아파서는 안 된다."
  
  아 이와 있다 보면 이 비슷한 아이 세계를 만나게 마련인데 그럴 땐 누구든 행복하게 웃으리라. 경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생각과 행동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 아이들과 오래 지내다 보니 세상이 왜 아이들 뜻대로 바뀌면 안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모두를 만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페르세폴리스'는 옛 이란,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한 왕궁 도시다. 마르잔 사트라피는 자기 나라의 뿌리를 제목으로 내놓으며 이란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을 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책을 쓰는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기원 후 두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엘람 왕국은 바빌론 주변의 문명을 발전시켜가고 있다." 그녀는 우리 호기심을 자극하여 세계사를 뒤지게 만든다. 페르시아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람 왕국에 이른다.
  
  " 이 오래되고 거대한 문명을 광신적인 근본주의와 테러 등에 관련지어서만"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르잔은 이란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고 결국은 <페르세폴리스>를 쓰게 됐다. 그녀는 확실히 성공했다. 우리는 그동안 갖고 있던 오해와 무지의 베일을 걷고 이란이라는 나라,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만난다. 그런데 '페르세폴리스'라는 제목에는 그녀가 살아온 여정이 남긴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새로운 문화에 들어가 적응하고 자신을 그 사회에 통합시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의 본래 문화는 잊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문화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길 원한다면 그건 우선 갖고 있던 것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고 나서 그 둘로부터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그걸 다시 삼켜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을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군지 모르게 된다. (…) 그게 어딘가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의 문제다."
  
  역사에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랄 수 있는 페르시아는 정복민에 대한 정책이 아주 너그러웠다. 페르시아 울타리에 들어간 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고유한 종교와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가꿀 수 있었다. 포용 정책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문화로 이어졌다. 페르세폴리스 왕궁 건축과 조각에는 그들이 정복한 민족들의 뛰어난 기술과 솜씨가 한 데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궁전 입구에는 사람 얼굴을 하고 날개를 단 황소로 조각된 거대한 문이 있는데 페르시아 제국 모든 민족이 자유로이 드나들었던 '만국의 문'이다.
  
  마르잔은 다른 나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지금도 자기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 그녀가 나라를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그리운 고향'은 없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삶이 지니고 있을 '기대와 두려움, 낯섬과 적응, 외로움, 고단함, 패배와 극복' 같은 것들이 그녀 삶에도 매달려 있다. 이제 그녀는 낯선 땅으로 되돌아가 산다.
  
  "난 이란에서 외국인이다.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내 나라에 돌아가기 어려워졌지만 한편으로 세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좋다. 그리고 동시에 힘들기도 하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지냈다. 컴퓨터도 안 쓰고 TV도 없는데다가 게으른 내 천성까지 겹쳐서, 수입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로 매일 밤 나라가 붉게 타오를 때도 한동안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책을 정확히 말하기에 적절한 사람은 아니다. 이 책 서평 제목은 객관성이 많이 떨어지고 심지어 엉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보이는 게 그렇다. 책을 직접 읽어서 내가 드리운 오해의 베일을 걷는 것도 재미있겠다.
  
  마르잔 경험에 견줄 수야 없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일, 길 위에 있는 우리 삶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말의 무게를 생각한다. 때로 낯설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마르잔은 어디서도 이방인이기에 옛 페르세폴리스가 더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살면서도 자기 빛깔을 살리며 풍성하게 어우러져 살던 곳. 누가 어디서 살든, 세상이 그런 곳이기만 하다면.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살에 오스트리아로 가서 프랑스계 학교에서 몇 년 지내다가 다시 제 나라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공부하며 결혼도 하지만 결국은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신문과 잡지에 일러스 트를 기고하거나 만화 작업을 하며 살고 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각색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원작 느낌이 아주 잘 살아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책과 애니메이션 어느 쪽을 봐도 마르잔 사트라피가 전하려는 이야기와 느낌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
 

/김호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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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나쁜 여자'를 강요하는 세상…당신은?" <김신명숙의 선택>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8

"'나쁜 여자'를 강요하는 세상…당신은?"

[철학자의 서재] <김신명숙의 선택>

기사입력 2008-11-01 오전 9:53:16


 왜 '선택'인가
  
  뒤늦은 호들갑인양 며칠 전 '알파걸'(<SBS 스페셜>, 2008년 10월 21일)이 방영되었다. 이미 김신명숙이 <김신명숙의 선택> 책머리에서 언급한 바대로, 알파걸이란 "학업과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자를 앞서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에서 언급했듯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보이거나 전교회장이나 반장이 여학생인 경우는 이제 더 이상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여자아이들 등쌀에 남자 아이들이 기를 못 편다는 부모들의 하소연까지 나올 정도라니, 정말 이렇게 '여풍'이 거세지다가는 세상 뒤집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김신명숙은 알파 걸들이 알파 우먼으로 향하는 행로에는 가부장제라는 오래된 미로가 놓여있다고 강조한다. <선택>이 줄곧 겨냥하는 핵심이자 극복해야 할 근본적 장애가 바로 가부장제다. 말하자면 "한국 여자들의 삶을 규정짓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김 신명숙은 이 책에서 여성들이 이 땅에서 겪어왔고, 겪고 있는 가부장적 질곡의 외화된 형태들을 아주 구체적인 예화를 시작으로 친절하게 풀어 나가고 있다. 저자의 방법은 제목에서부터 격렬함을 보여 주었던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식이 아니라, 거의 모든 페미니즘의 시각을 동원해서 문제를 진단하고, 절절히 가슴에 와 닿게 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통해 '여성적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연대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책은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익히 우리가 접하고 있거나 고민해 본 경험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현재에도 우리들에게 유효한 만큼 저자가 예시한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실존적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선택'은 가부장제에 의해 길들여지길 거부하고 주체적인 당당한 여성인 "나쁜 여자"가 되는 길이다.
  
  아직도 '가부장제'인가
  

▲ <김신명숙의 선택>(김신명숙 지음, 이프 펴냄) ⓒ프레시안

  왜 나쁜 여자이어야 하는가? 가까이는 우리가 접하는 언어로부터 자본주의적 기제까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여자의 일생'이 나쁜 여자이게끔 한다. 저자가 잘못된 언어 이데올로기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언어는 의식을 담는 그릇이다. 잘못된 언어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만들어 낸다. 예컨대 '예쁘지도 않은 게' 자기주장만 하는 "드센 여자"라는 말에는 이미 한국 사회의 남성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나 관념이 담겨 있다. 방송도 얼짱, 몸짱, S라인 등의 유행어를 서슴지 않고 만들어 냄으로써 "외모가 권력이자 재능"이라는 '미의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가장, 주부(주인의 아내), 집사람, 내조, 친가, 외가, 미망인, 윤락녀 등."
  
  우 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적 대중 매체가 생산한 가부장제의 신화 속에 살고 있다. 신화는 편견의 사회가 만들어 낸 '동굴'이자 '우상'이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서 보듯이, 우리가 사는 일상은 대중 매체에 의해 여론이 조작되기도 하며, 현자와 어리석은 자가 뒤바뀌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객이 전도되고 허위와 가식이 진리를 지배한다는 비유이다. 동굴이란 다름 아닌 한국 사회의 전통적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이자 성차별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한 국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과 갈등은 다중적이고 다양하게 얽혀 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여성의 갈등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가족'을 둘러싼 가부장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가부장제 가족은 전통윤리에서 시민사회로의 이행과 더불어 서양근대초기의 핵가족의 성격을 보이면서도 여전히 "문화적으로는 부계 중심 대가족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따로 핵가족을 꾸리더라도 며느리로서 '시가'와 맺는 관계는 엄연하게 끊임없이 차별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로 지속된다. 한국사회의 명절 풍습은 이러한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남자는 제사를 모실 몸이므로 깨끗한 양복에 멋진 넥타이핀까지 꽂았다. 아기도 꼬까옷을 입고 예쁜 모자까지 썼다. 그러나 여자는 낡은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꺼내 입는다. 여자는 시댁에 '오직 일하러' 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시집에 도착해 현관을 들어서면 여자는 시어머니 얼굴에서 '왜 이제 오냐'는 뚱한 표정을 읽는다. 시어머니는 손주를 덥석 안아 간다. 여자가 아이를 업고 오는 동안 이마에 흐른 땀을 닦기도 전에 '올케, 튀김 해야지'하고 친정에서 사는 손위 시누이가 인사를 대신해 부엌으로 호출한다." (주부 이연경 씨의 '명절 일기', <우리 시대의 결혼 이야기> 중)
  
  문제는 여성의 자기 정체성이 여성 자신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성이 주체로 서기 힘든 것은 우리 사회의 권력 관계 때문이다. 권력 관계의 핵심은 근대적 가부장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고부갈등, 동서갈등, 양가 가족(가문)간의 갈등이 부부 중심인 핵가족과 함께 지속되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근대로의 진행 여부와 무관하게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전근대와 근대, 탈근/현대가 3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삼겹살문화'에서는 여전히 가족 내의 여성에 대한 시선이 타자의 입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삼종지도나 출가외인 등의 규범이 정도는 차이는 있지만 암암리에 가족의 권력 구조에 영향을 준다. 가부장제적 문화의 유산은 그 문화 안에서의 구성원간의 권력의 서열 구조를 유지하 게 한다. 시가의 어린 도련님에게는 공대를 요구하고 처남에게는 반말이 허용되듯이 대부분의 고부 관계는 경직된 관계를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서열의 권력관계는 고부관계를 역할 위주의 관계로만 보기 때문에 며느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 볼 수 있는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즉 시어머니로부터의 며느리에 대한 '소외' 현상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 리는 <선택>에서 보여 준 구체적인 여성들의 경험들을 통해서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성과 인간성이 양립하기 힘든 구조적 이유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여성은 타자의 시선, 즉 권력 아래 놓여 있고 그로 인해 여성으로만 대접받기 일쑤다. 여성은 가족과 법, 제도 그리고 문화 등에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저자는 여성이 어떻게 통제 받는 성이 아니라 자유로운 성을 누리는 성적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의 성 경험에 대해 당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백마 탄 환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주부의 가사노동은 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차별고용 차별임금을 어떻게 형평하게 바꿀 수 있을까 등을 실제와 더불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필 자가 보기에 <선택>에는 다양한 페미니즘의 갈래가 제시되고 있지만, 저자는 특히 한국사회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착종되어 있는 사회로 규정하고 있고 대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여성들이 숙명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골 깊은 가부장제에 대해 여성들의 실존적 '선택'과 '결단'을 넘어 여성들끼리 여성의 시각으로 재정립하는 '사회적 연대'를 희망한다. <선택>은 말한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조직하세요!(Don't agonize. Organize!)" "서로가 서로의 지지자가 되는 서포트 그룹(support group)을 만드세요."
  
  혹자가 제기하듯이 여성들만의 '선택'인가?
  
  " 세상에 여자만의 문제란 없거나 지극히 적다. 여성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남성이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성의 문제란 언제나 남성과 관련된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상대인 남성을 적대 개념으로 다루고 방법을 투쟁만으로 일관한다면 너희 선택의 폭은 너무 좁고 비극적이 된다. (…) 그런데 내게는 그 <여성의 자기 성취>란 말과 거기 따른 논의처럼 애매하고 수상쩍은 것도 없다. 그리고 수상쩍은 것은 그 애매한 논의로 여성을 충동질하는 저의이다" (이문열, <선택> 중)
  
  이 문열이 '선택'을 구상한 의도는 "우리의 삶에 한 본보기가 될 만한 여인상을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내는 데 있었다." 주인공 장씨(張氏) 부인은 글과 예(藝)에 재주가 있으나 오히려 집안 살림을 선택하고 '가문'을 선택한 400년 전의 실존 인물이다. 물론 장씨 부인의 입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현재를 비판하려 했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이문열 자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너희 논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기의 일을 가져라. 자아를 되찾아라.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라. 가정에서 해방되라. 그런데 내게는 그런 권유들이 마치 자기 성취를 원하는 여성에게는 가정은 감옥이고 남편은 폭군이며 아이들을 족쇄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현모양처란 무능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고 내조와 양육은 허송세월의 동의어인 듯하다." (이문열, <선택> 중)
  
  이 문열의 지적처럼 여성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다. 다만 인간 속에 '여성'이 빠져 있는 가부장제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 현재의 여성의 권리는 놀랄 만치 급신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선택>에서 페미니즘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일 뿐더러, "미래의 성차별 없는 세상에서 온 사람의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결국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사회의 재편성"이면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두 주체로 만나 진실로 교감하며 사랑할 수 있도록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남는 문제
  
  여성 문제는 논의의 정합성 이전에 구체적 현실이다. 아직도 '아들딸을 골라 낳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임신법 이 판치고 있고, 자신은 여성이면서도 정작 이 사회를 살아야 할 딸(여성)들의 앞날을 걱정스레 예측해 보고, 여성이 여성(딸)을 낙태하고, 여성이 남성(아들)을 선택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는 '동굴'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느새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지배에 익숙해지고, 타자로서 익숙해진 구조에서 '가족'이라는 명분 아래 집단 이기주의를 노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더욱 소외되고, 물화되고 주변화 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전략대로 페미니즘이 더 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에 집착하지 말며 계급, 인종, 민족, 연령 등에 따른 불평등과 다양한 문화적 차이 속에서의 갈등에 주목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봉건성과 불완전한 근대성이 압도적인 한국 상황에서 '여성' 범주의 정치적 의미는 저항의 강력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지적대로 본질적인 여성의 범주가 없다는 논의가 쟁점이 되겠지만, 여전히 한국 상황은 여성임을 인정하게 하는 사회적·정치적 기제가 깔려 있다. 이제까지 역사에서 여성은 타자로서 주변에 머물러왔다. 여성 문제는 은유나 추상성으로 대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국 계급, 인종, 민족의 관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편으로서의 여성(인간)을 도출할 것인가가 실천적인 숙제다.
 

/김성민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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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아나키'는 과연 힘이 셀까?"<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6

"'아나키'는 과연 힘이 셀까?"

[철학자의 서재]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기사입력 2008-10-25 오전 9:29:38


아나코-코뮤니즘의 의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이 쓴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면서 지은이 나름대로 아나키즘을 한국 상황에 재접목하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은 'anarcho-communism'이다.
  
  지은이는 이를 아나코-코뮨주의(또는 아나코-코뮤니즘)로 부른다. 이때 아나키즘의 약자인 아나코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일상생활 전체를 변화시키자는 대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개인의 대립'이라는 좁은 해석을 의미하는 무정부주의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편, 코뮤니즘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를 담고 있는 '코뮨'(commune)이라는 공동체를 건설,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적 코뮨 간의 연대'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고 지은이 역시 이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는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공산주의를 규정할 때 말한 것인데, 이 책에는 그런 언급이 따로 없다. 어쨌든 1910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아나키즘 항목을 직접 집필한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아나코-코뮤니즘은 문명사회에서 수용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공산주의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은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사회의 진화 방식을 지칭하는 두 가지 용어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와 아나코-코뮨주의로 대변되는 아나키즘은 확실히 닮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자(특히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는 상당 부분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 아나키스트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기존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아나키즘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지은이는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회의 윤리이자 조직 원리로서의 상호부조, 그리고 그러한 대의를 전파할 수단인 '실행을 통한 선전'(테러리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도달할 새로운 사회인 코뮨, 이것이 아나코-코뮤니즘의 원리이자 목표일 것이다.
  
  여 기서 말하는 코뮨주의는 이진경의 코뮨주의(commune-ism)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진경은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당(조직)' 그리고 '아곤'(agon)이라는 '적대적이지 않은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진경의 코뮨주의는 국가 장치와 자본 축적을 연관시켜 파악하고 그 힘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기계, 소수자들의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아나키즘 개념과 아나키스트의 실천
  

▲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 사실'은 '선택'되는 것이고 선택되는 이유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념화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정치 조직·권력·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별로 시사해주는 바가 없다.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즘을 어떻게 실천했고, 또 그들의 실천에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들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볼셰비키가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라는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1918년 봄에는 볼셰비키와 갈라설 것을 결의했다. 이후 혁명을 되돌리려는 백군과의 내전 때문에 양자는 일시 휴전하기도 했지만 아나키스트의 몰락은 예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은이는 아나키스트를 향한 볼셰비키의 잔혹성과 기만을 고발한다. 그러나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주의적 본성은 혁명을 지켜내고 완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볼셰비키의 판단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보기에 그것은 정치 조직이었고, 권력을 지향하는 볼셰비키에게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인간이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볼셰 비키가 아나키스트들을 혁명의 걸림돌로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지도자들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조직 여부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를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 조직이 권위주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나키스트 사전>(1935)을 인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회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한다는 것.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가 이런 실천을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크 로포트킨은 바쿠닌의 동지 기욤이 이끌던 쥐라연합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바쿠닌이 죽고 기욤이 은퇴하자 아나키스트 운동이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1921년 2월 크로포트킨이 사망하자 러시아 아나키즘도 서서히 종말을 고했다는 점 등은 그 지도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것이며 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 운동이 사실은 상당 부분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지은이가 소개하는 아나키즘 개념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아나키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 '을 뜻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듯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선장이 없다는 없음(無)의 실재보다 누구라도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有)의 여백이 바로 아나키의 질서이다.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분명하고(clear) 정확한(distinct)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곤란한 개념이다. 선장의 필요성 여부가 모호하게(obscure)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장 없이도 선원들이 지혜를 발휘하여 배를 잘 이끌고 나갈 수 있다면 선장은 없어도 된다. 아마도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일 것이다. '누구라도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의 여백'은 선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나키즘 개념이 후자라면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 왜 그를 잇는 지도자가 바로 등장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나 선장이 될 수 없는 구조, 권위에 의존했던 실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자가 아나키즘 개념이라면 그것은 실천된 바가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부르주아 권력 간의 식민지 시장 쟁탈전이라고 정확히 규정했음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총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오판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신간회와의 대립이 그것이고, 해방 후에는 당을 결성하고 선거에 나선 것이 또 하나의 사례이다. 선장이 있었든 없었든 아나키스트 배는 산으로 갔다.
  
  지은이는 아나키즘의 쇠퇴 이유를 각국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본다. 그렇지만 어디 아나키스트만 극심한 탄압을 받았겠는가. 아나키스트 스스로 자초한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나키즘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남 탓'보다 '내 탓'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상호부조론>과 진화론 그리고 유전자론
  
  지은이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윈의 진화론을 새롭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도킨스류의 유전자 중심론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 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은 증명하기 어려운 가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서로 돕는 존재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도 유리하니, '코뮨'을 건설하고 코뮨끼리 연대하여 아나코-코뮤니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아나키즘이 필요한 이유는 '선장의 폭력과 독선' 때문이다.
  
  <상호부조론>의 1차적인 목표는 다윈이 주장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부조론>에서 주목할 것은 다윈이 알고 있었지만 발전시키지 않았던 면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개체들 간의 생존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과 도움이 최상의 생존조건을 확보하게 해 준다고 봤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많이 제시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책을 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추종자들은 이론의 폭을 축소시켜 생존경쟁만을 강조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헉슬리이다.
  
  헉슬리는 다른 국가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물을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비용은 생산비의 큰 요소이므로 임금 수준을 일정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 역시 자연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헉슬리의 주장은 다른 인종을 착취하는 백인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크로포트킨으로서는 그와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 엇보다도 지은이가 이 책에서 공헌한 것은 <상호부조론>과 유전자 중심론의 관계를 보여주고 유전자 중심론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밝힌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크로포트킨이 관찰한 자연계의 상호부조는 유전자가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이기적인 행위의 일종일 뿐이다. 유전자에게서 발견되는 이타성은 본성이 아니라 어떤 보답을 고려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하는 자연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적자생존을 통한 자연도태를 막으며, 더구나 바로 그 이타성 때문에 이기적인 개체들에 의해서 악용되고 남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 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도킨스의 논의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협동적인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타심이란 이기심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미덕'이며, 사적 소유권을 명확하게 하면 할수록 그것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이기심을 억누르고 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도킨스나 리들리의 논의는 복지국가의 활동 범위를 축소하자는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기여할 위험이 있기도 하다.
  
  아나키즘과 접속 가능성이 있는 운동들
  
  지 은이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아나키스트들이 보여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자본의 세계화'를 거부하는 운동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운동은 반(反)세계화운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연대'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 아나코-코뮨주의와 일정 정도 친화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2003)를 인용하면서 자율주의운동과 아나키즘은 여러 면에서 아나키즘과 접속가능성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을 토대로 국가에 맞서 코뮨을 부활시키려는 이진경의 코뮨주의도 아나키즘과 접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접속 가능성이 아나키즘 개념의 모호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날의 운동은 확실히 엘리트에 의한 지도나 전위를 거부하고 대중들의 자율과 자기 결정을 존중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 속에는 대중들을 자율적 주체로 호명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이 자신을 주체로 판단하면 운동 지도부는 '지도하지 않는 지도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
 

/이순웅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3부장·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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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소비 안에 우리는 존재하는가"<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5

"소비 안에 우리는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기사입력 2008-10-17 오후 6:48:32


인간에게 소비의 의미

현대는 소비사회다. 일상은 소비의 연속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행위는 대부분 소비로 환원된다. 누구를 만나도 만남 자체가 소비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등의 일에도 일련의 소비가 수반된 다. 물론 현대인만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교환을 위해 인간은 언제나 소비를 해왔다. 오늘날의 소비에 다른 점이 있다면 상품화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과잉생산된 것을 소모하기 위해 소비가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소비가 모든 것이 된 것이다.

소비에 관한 국내 저작이 드문 상황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를 발견했다. 이 책에는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로빈슨 크루소와 소비가 무슨 상관인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무인도에 살아도 당장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는 '사치'를 부리고자 하며, 그러한 사치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비축과 저장을 함으로써 서서히 우리는 동물적 필요에서 벗어났고 또 욕구와의 일대일 대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즉, 당장의 필요 이상의 것을 비축하고 소비하는 사치는, 그 말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인간을 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주요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여분의 소유와 그것의 소비인 '사치'를 포틀라치, 예술, 일상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논증을 찾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기저에 흐르는 하나의 목소리는 들린다. 당장의 필요를 넘어선 소비를 할 때 문화를 누리지만, 정작 현대의 소비문화는 우리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표 하에 현대 소비사회의 정경들을 따라가 보자.

포틀라치, 타인을 위한 소비인가?

▲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 ⓒ프레시안

저자는 소비의 한 차원으로 타인에게 귀속되는 소비, 그 중에서도 특히 권력의지로 행사되는 소비인 포틀라치를 논의한다. 포틀라치는 인디언 부족의 관습으로 통상 소비의 한계를 넘는 낭비적 증여를 뜻한다. 한 부족은 낯선 부족에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도를 넘는 선물을 전달했다. 이러한 증여는 증여하는 자의 권위를 보여주고 증여받는 자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는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지의 실행으로서의 증여는 통치를 위해 필요한 기제였다.

저자는 이러한 포틀라치가 원시 부족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통용된다고 본다. 내 의지를 실현하는데 상대의 권력이 필요한 경우 뇌물은 그 권력을 내 의지 아래 종속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심심할 만하면 터지는 뇌물수수 사건은 동물에는 없는 인간 사회의 소비의 한 단면이지만, 이런 소비는 부당한 방식으로 부와 권력의 집중을 가져와 사회를 병들게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럼 좋은 포틀라치도 있는가? 저자는 진정한 증여는 권력의지의 실행이 아닌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한 가족, 한 개인, 한 부족은 얼마든지 부유해질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부 주위에 앉을 수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공동체를 위한 증여는 크든 작든 기부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의 생각처럼 이런 증여적 소비는 부가 일부 집단에 축적되는 병폐를 막아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부가 집중되는 사회일수록 이러한 기부는 더욱 요청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오늘날, 저자가 포틀라치의 다른 측면인 공동체를 위한 소비에 주목한 것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예술,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가?

저 자는 소비를 예술과 관련해서도 논의한다. 주로 부르디외의 논의에 기대어 예술의 소비를 계급을 나누는 '구별짓기'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예술과 문화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공의 것이라는 인식과 달리 철저히 계층에 따라 나뉘어 소비된다는 것이다. 계층에 따라 '소비'되는 예술의 목록이 다르고, 특히 일부 회화음악은 어린 시절 형성된 교육이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다고도 언급한다. 문화자본은 경제자본과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계층적 차이를 드러낼뿐더러 계층 구분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위 '고급 예술'이라 분류되는 것들은 평균적 봉급 생활자가 누리기 힘들다. 오페라 한 편을 볼 만한 자리에서 한 가족이 보면 한 달 생활비가 휘청댈 것이다. 물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술도 있다. 미술 관람은 공연 관람보다 비용이 덜 든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미술이 더 멀다. 저자는 이를 "원칙적으로 미술관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이것은 순수한 가능성일 뿐, 실제로 이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중 일부"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러한 예술에서의 구별짓기는 아무리 학교가 평준화되어도 평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예술에서의 감식력이라는 저자의 언급과도 연결된다. "인위적으로 동네를 배치해도 (…) 사회적 신분 이동은 잘 일어나지 않는데, 신분 상승은 문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문화는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서만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 지만 모두가 예술을 즐겨야 하는가? 나아가 예술을 신분 상승을 위해 가까이하자는 것인가? 물론 저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원하면'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문화의 기회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소비'에서의 기회 평등을 보장할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진정 사회적 평등을 이루고 싶다면 문화를 저변에 보급하는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견, 경제적 소비에서조차 불평등이 심각한 현실에서 예술 '소비'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가 인간 삶의 기초 조건이라면 둘의 관계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차원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예술 교육 확대를 통해 예술 '소비'-감상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에서 형평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은 주목할 만한다.

일상에서의 소비, 욕망을 실현하는가?

저자는 포틀라치나 예술과 같은 소비 이외에, 일상에서의 소비도 분석한다. 그 대상은 주로 광고, 유행, 육체 등이다. 온종일 머리를 휘젓는 광고, 사물의 유통기한을 단축시키는 유행, 젊음과 날씬함을 정상성의 표준으로 삼는 몸은 일상적 소비의 주요한 준거점들이다. 문제는 이런 소비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해 주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보드리야르에 따라 현대의 소비를 '기호의 소비'로 특징짓고 그것의 구조를 분석한다. 기호란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지는데, 기표는 문자나 음성 등의 방식으로 주어지고 기의는 그 기표에 부여되는 의미를 말한다. 같은 기표도 보는 이에게 의미가 다르면 다른 기호가 된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라고 동일하게 표시한다 해도(기표) 누군가에게 메트로폴리탄적 자유를 다른 누군가에게 불공정무역의 산물(기의)을 의미한다면 그 둘은 스타벅스를 다른 기호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품의 가치는 주로 기의가 결정한다. 소위 명품은 그 상품에 고급스럽고 희소하다는 의미가 불어넣 어졌기 때문에 가치가 높아진다. 기호의 소비란 상품 자체보다는 상품에 들러붙은 의미, 특히 나는 남과 다르다는 차별화된 의미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난 당신과 달라'는 모든 상품이 생존하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기본 명제이다. 이러한 차이 중 계층적 차이가 특히 중시되는데 이는 "현재의 나보다 좀더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차이의 강조가 매우 동질적이라는 점이다. '당신은 다르다'는 광고 문구는 수많은 대중을 향한 것이다. 이에 대중이 각자의 개성을 살리려고 같은 상품을 소비한다면 어떻게 될까? 개성을 위해 소비할수록 더 동질화되는 대량생산 사회의 소비의 역설에 처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현대 소비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개성에는 그러니까 집단이 있을 뿐 개별성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개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개의 모델 속에 나누어 배치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량생산 사회에서 개성적 소비가 가능한가?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적 언급을 하지 않는데, DIY·리폼·UCC 등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보았더라면 좋았겠다 싶다. 판자를 조립하여 나만의 책상을 만들고, 청바지를 내 마음에 들게 리폼하고, 문화 콘텐츠를 차용하여 패러디하는 등의 활동은 개성을 찾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을 반영한다. 이미 틀 지워진 것 안에서의 손질이 개성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로 남지만, 우리가 직접 만들어 쓸 수 없다면 이런 정도의 개입도 실천적 의미는 있지 않을까?

소외 없는 소비의 가능성

이 책의 출발점은 인간은 본능의 실현 이외의 것을 소유하고 또 소비하려는 존재이고 그러한 '사치'는 인간이 문화적 존재로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 여정은 우리의 '사치'가 도리어 우리를 소외시켜 온 경로들 즉, 부당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며 자신의 욕망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는 소비사회를 사는 우리 자신의 씁쓸한 모습을 반영한다.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소비 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혹은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정신없이 쇼핑하고 뛰어다니는 일상들, 사람들은 그것들을 역동적인 활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 자신의 열정의 근원이라 생각했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었고, 자신이 설정했던 목표는 끊임없이 배반당했으며, 마침내 야망 없이 무기력한 일상만 남았다"고 토로한다.

그 러면 소비사회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치를 문화적 조건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사치'를 부려야 제대로 부리는 것인가? 어떤 변화가 있어야 공동체와 나누고 예술을 향유하며 개성을 찾는 식으로 소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소비사회 분석에 치중하다 보니 이러한 물음에 대한 총괄적 대안까지 마련해 주지는 못한다. 소비할수록 욕망에서 멀어지는 소비사회의 대중이 자신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하는 문제는 독자에게 남겨진다.

더 근본적으로는 소비를 생태와 연관해 논의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도대체 인간의 사치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인간이 생산한 것을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소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소비를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인간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당장의 필요를 넘어선 소유와 그것의 소비' 자체가 문제거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사치'는 인간에게는 문화의 조건이지만 도를 넘으면 생태계 전체로 봐서는 자연을 '착취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이 한 권의 책 속에 소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 담아낼 부담을 질 필요는 없다. 포괄적 의미에서 윤리적 소비의 문제 즉, 어떻게 하면 나와 공동체 그리고 생태계가 상생하는 소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책이 남겨 준 생산적 물음으로 가져가야 할 것 같다.
박정자는 누구인가?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신문기자, 고교 교사, 준 공무원 등을 거쳐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가 되었고 2008년 8월에 퇴임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빈센트의 구두> 등의 저서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상황 V>, <여성은 해방되었는가>, <성은 억압되었는가>,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30년 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등의 역서가 있다. 지은이는 소비에 관한 주요한 이론가들인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마르셀 모스, 소스타인 베블런, 앙리 르페브르, 장 보드리야르 등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을 그려내는 만만찮은 작업을 해냈다.
 

/현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원·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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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4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철학자의 서재]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기사입력 2008-10-11 오전 9:38:49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극단적인 논박이 결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구나 하는 좀 역설적인 안위마저 드는 책이었다. 미국은 물론 우리 사회에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논평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책의 비판 대상인 기독교를 두고 본다면 미국과 한국은 매우 유사하다. 한국도 미국처럼 공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저자는 대체로 개신교를 지칭함)가 강력한 힘을 지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매우 불쾌하거나 적의마저 느낄 것이다. 반면 평소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독자라면 무척 통쾌하고 시원한 감정마저 들 법하다. 이 책의 저자 샘 해리스는 매우 강한 어조로-때로 전투적이고 선동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기독교를 비판한다.

그가 사용한 수사와 논리는 보수 기독교의 그것처럼 비약이 심하고 날이 서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역사비평이나 해석학적 반성과 같이 최소한의 이해나 해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성경의 문구문자 그대로 비판을 감행한다. 이러한 해석의 노력이 없으니 성경이 온통 오류와 모순에 가득한 황당한 이야기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무신론, 이성, 과학이라는 척도

▲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샘 해리스 지음,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 ⓒ프레시안

그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근거는 무신론, 이성, 과학이다. 그에게 이 척도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척도처럼 전제된다. 마치 기독교가 신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의 보수 기독교를 종교 일반으로 확대하여 모든 종교를 문제 삼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신론은 철학도 아니고, 세계관도 아니며, 단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67쪽)

"신앙이란 모든 논리적 추론이 실패했을 때,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줄 수 있는 면책에 불과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굳게 믿는 행위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미쳤거나 어리석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신에 대한 믿음에서만큼은 여전히 큰 명예를 나타낸다. 종교는 어떤 사람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고상하게 보이는 유일한 담론이다." (85쪽)

담론은 소통을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저자의 이런 발언은 소통을 위한 담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소통이 아닌 극단적 대립과 갈등의 표현이다. 자신의 주장을 통해 상대방의 소멸이 가능하다는 선언 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공격적인 어투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그것은 그가 거의 종교적 신념처럼 말하는 무신론이라는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무신론(atheism)은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온 사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라는 문화토양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상이다. 무신론(atheism)은 유신론(theism)의 부정어이기에 태생적으로 유신론 없이는 존재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전통이 없는 문화에 무신론자가 있을 리 없다. 무신론이라는 말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일원인 우리사회에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것일 뿐이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언어로 증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면, 그 헛된 논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한 논쟁은 마치 동일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 전통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그 렇다면 저자가 무신론과 함께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이성과 과학은 어떤가? 근대과학은 측정량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려는 좁은 길로 들어선 사유방식이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힘이 세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그러한 척도로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그 척도에 의해 세계가 제한됨을 의미한다.

자(척도)는 자일뿐이다. 본래 제한된 척도를 무차별적으로 확대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영원의 척도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과학을 수행하는 이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한자(有限者)가 지닌 제한된 능력일 뿐이다. 척도를 의미하는 영어인 'measure'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환영(幻影)을 뜻하는 'maya'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했음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건전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기독교 비판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진보 혹은 개혁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기독교의 인과응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 내용과 관계없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미 국 사회에서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갖고 있는 문제를 비판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만 보아도 너무나 명백하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무익하고 유해한 대립과 다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대신 오히려 기독교와 소통하는 길을 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무릇 기독교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과 사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사상은 그 어려운 신학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예수는 하느님(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고, 그것을 실천하다 순직하신 분이다. 이를 더 줄이면 "하느님(하나님)은 사랑이시다"로 말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에 사랑이 없으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근본은 바로 이 간단한 언명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메시지 때문에 기독교는 민족과 언어를 넘어 복된 소식을 전하는 구원 종교로서 성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우리 사회에서 모든 공격적인 형태의 기독교는 바로 이 근본을 어긴 것이다.

나 는 기독교의 진정한 근본주의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명제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습으로 드러내어야 할 가치일 뿐이다. 사랑의 모습이 없으면서 하느님(하나님)을 거론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근본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기독교인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좋은 기회라고 본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다. 그렇지만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무릇 비판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스스로 비판대에 올라야 한다. 자신이 휘두르는 비판의 잣대가 무엇인지, 한계나 오류가 없는지 먼저 반성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당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더 큰 분쟁과 다툼을 유발할 뿐이다.

대립을 넘은 소통을 기대하며

종교든 과학이든 자신의 척도만을 영원의 척도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중심을 갖되 겸허하게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배우며 깨달아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다석 유영모 선생을 떠올려 본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전통적 교리에 갇히지 않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자유로이 오간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그에게 여러 종교의 다양한 교의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역설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핵심적인 사상과 종교가 들어와 조화하며 갈등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 큰 축복일 수 있다. 단순히 사상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의 과정 속에서 저마다 어떤 자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저물어가는 미국을 보면서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이 땅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이 출현할 수 있는 에너지집중되고 있다. 유영모 선생은 그 힘을 선취한 한 전형이다.

척도가 항상 미국이나 유럽, 중국 같은 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식민성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는 금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겠지만 말이다.

끝으로 서평을 맺으며 한 생각이 스친다. 다름 아닌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 지난 9월부터 하고 있는 오체투지 수행이다. 그들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로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의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종교의 구분도, 인간과 미물의 구분도 사라진 듯이 보인다. 오직 가장 낮은 곳에서 땅의 숨결을 느끼며 세상을 응시할 뿐이다. 상대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도 그 과오에 이미 동참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묵언으로 촉구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척도와 가능성을 겸허하게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김희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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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은 있는가?" <진과 대니>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2
세계 리포트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은 있는가?"

[철학자의 서재] <진과 대니>

기사입력 2008-10-03 오전 11:29:47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자아 찾기와 다문화주의

진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중국인이다. 그가 미국 문화에 적응하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참다운 자아를 찾는 과정이 책 속에서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전개된다.

자 아 찾기는 시공간을 통틀어 어느 시기나, 어느 지역에서나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책의 자아 찾기는 21세기의 세계사적 현실이면서 동시에 동남아시아인의 유입이 증가하는 한국에서 확산되는 '다문화주의'를 시기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다문화적 자아 찾기는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충돌보다는, 한 국가 안에 살지만 인종, 민족, 종교, 관습, 계층, 교육 정도를 포괄하는 문화적 차원이 다른 사람들 간의 충돌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아 정체성을 찾는 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진행되지만, 다문화 사회라면 나와 타인의 관계 속에 '나의 문화'와 '타인의 문화' 간의 갈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변신하는 주인공들, 트랜스포머

이 책은 타문화를 받아들여서 그 문화를 좇는 것을, 그리고 타문화의 모습대로 나를 변형하는 것을 '트랜스포머'로 규정한다. 책의 주인공은 진이지만, 자아 찾기의 중심에는 대니, 손오공, 웨이첸이 옴니버스 식으로 등장하며 서로 중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변신(트랜스폼)을 거치는 자는 진, 인간처럼 되기 위해 인간의 신을 신는 손오공, 인간을 섬기는 사자 역할을 부여받은 웨이첸이다.

진은 중국인이며, 어렸을 때는 중국인 친구들과 재미있게 논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미국 학생들과 사귀지 못하고 외롭게 지낸다. 한 명을 사귀기는 하지만, 먹보이면서 바보라서 미국인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이다.

대 니는 미국인인데, 중국인 사촌 형제 친키가 있다. 간혹 사촌 형제가 찾아와서 대니가 미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학교 생활이 불편하다. 중국인으로 취급받기 싫어하는 대니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두려워 계속 전학을 다닌다.

웨 이첸은 진이 다니는 학교에 전학을 온 중국인이다. 전학을 온 웨이첸이 학생에게 소개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진은 왠지 그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웨이첸이 보여준 모습은 진이 전학을 와서 처음 소개받을 때 보여준 행동과 유사하며 선생님의 소개 과정도 진을 소개할 때의 실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이 생긴다. 진은 웨이첸을 싫어하지만, 웨이첸이 미국으로 올 때 그의 아버지가 주셨다는 트랜스포머 인형을 발견하고서 친해지기 시작한다.

각 장마다 주인공을 달리하여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앞장의 주인공이 변신하여 뒷장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차후에 드러난다. 옴니버스 식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얘기는 별개의 얘기가 아니라, 뒤의 주인공이 앞의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로 드러나면서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룬다.

예를 들면 서양인 대니는 영혼을 버리고서 만든 진의 다른 모습이다. 대니의 중국인 사촌 형제 친키는 손오공의 변신이다. 웨이첸은 손오공의 아들이며, 진이 영혼을 유지하고 양심을 회복하도록 섬기는 사자이다. 그러나 웨이첸은 그가 사귀는 일본인 여학생 수지에게 진이 일방적으로 키스를 하고 진 자신이 미국 학생에게 당한 것과 유사한 행동을 웨이첸에게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에게 실망하여 사자 역할을 그만둔다. 그러자 이제는 미국인처럼 변신해 버린 대니에게 친키, 즉 손오공이 대신 찾아온다. 손오공은 대니가 영혼을 회복하여 진으로 변신하도록 자극을 준다. 그리고 웨이첸이 사자 역할로 회귀하도록 도와 달라고 진에게 부탁한다.

웨 이첸은 진의 성장을 도와주는 사자이지만, 웨이첸도 진을 통해 성장통과 자아 찾기 모두에서 도움을 받는 구조를 지닌다. 도와주고 배려하는 인간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이다. 대니와 친키 또한 진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변신하기=영혼을 버리기
▲ <진과 대니>(진루엔양 지음, 이청채 옮김, 비아북 펴냄) ⓒ프레시안

드 라마틱한 반전, 사자와 인간간의 역할 반전 속에서 다른 문화를 지닌 타인이 나의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다양한 모습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마치 다중인격처럼 처리하며,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인격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오해의 시작은 트랜스포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여주는 한약방 할머니의 입을 통해 미리 예견할 수 있다. 한약방 할머니는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될 수 있단다 (…) 네 영혼을 버릴 마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내가 타문화 사람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영혼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영혼'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혼을 버리는 것'이 뒤에서는 '양심을 상실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규정된다.

트랜스포머를 '영혼과 양심을 버리는 것'으로 은유하는 것은 내가 아닌 모습으로 (억지로)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나의 정체성을 찾아갈 때 기존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문점이 남는다. 나의 정체성, 나의 고유성, 나의 본래성이 무엇인가? 중국인이 서양인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본래성을 잃는 행위인가? 정체성이 민족적, 종족적 요소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

자 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혼을 버리는 것으로 과대 해석된다. 다른 문화의 정체성을 쫓아가는 것이 양심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진이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성장할 때, 필자는 정체성과 본래성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어떻게 비판하든 간에,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고 주변의 영향을 받아 달라진다. 변하기 때문에 동일성 찾기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변화 가운데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를 상정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변화 속에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나의 정체성은 성장 과정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조건들의 어울림에서 확립된다. 중국 문화를 버리고 미국 문화를 쫓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중국적 정체성만도, 미국적 정체성만도 아닌 정체성이 등장할 수 있다. 어떤 정체성일지는 아직 추측할 수 없지만.

변신의 변신, 트랜스폼의 긍정성

나의 모습이 아닌데, 다른 모습으로 억지로 되려고 하다 보면, 불법을 저지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양심만 버린다면, 현재의 착한 모습에서 얼마든지 악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법과 악인으로의 전락이 아니라면, 나의 정신세계와 생활 습관과 문화 양식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은 트랜스포머를 통해 성장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변신을 영혼과 양심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과도한 자기중심주의나 부적절한 범주 사용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그런데도 책의 저자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쓰는 것은, 어떤 자아 정체성과 어떤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든지 간에 '나'를, '나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대니를 찾아온 손오공이 인간처럼 되기 위해 악전고투하다 깨달은 것을 다음처럼 말한다. "내가 원숭이로 태어난 게 정말 좋다는 사실만 내가 일찍 깨달았어도 500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면할 수 있었어". 그의 깨달음은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의 존재 자체를, 나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자유자)이 존재 자체에 만족을 느끼듯이, 스스로 존재하지는 못하지만 유한한 규정과 유한한 한계를 지니는 '인간 유한자들'도 존재 자체에 만족하라는 메시지이다.

나의 존재 자체에 가치를 두고, 나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면, 반대로 타인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고,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인정을 낳게 된다. 나에 대한 참다운 인정은 나와 타인 간의 가치 우열을 사라지게 하므로, 타인에 대한 참다운 인정으로 이어진다. 각 개인, 각 문화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면 비교 우위를 상실하면서 문화의 중심도, 문화의 주변도 사라진다. 특정 문화의 우월성, 즉 서양 문화의 우월성과 중국 문화의 열등성, 서양적 자아의 우월성과 중국적 자아의 열등성이 자연스럽게 깨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가 질문, 즉 "진은 왜 대니로 되려고 하는가?"까지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인이 서양으로 이민을 간 것이라서 주류 문화는 서양 문화이고, 중국 문화는 주변 문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은 주류 문화에 동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서양인의 생활 방식과 서양 학생의 태도가 마치 중국 문화와 중국적 생활 방식을 열등하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진에 대한 학생들의 무시, '왕따'가 눈에 띄며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반대로 서양인이 중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서양인도 주류 중국 문화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서양인이 동양인을 누런둥이라고 부르듯이, 중국인도 서양인을 흰둥이라고 부를까? 타문화 속의 서양인도 진처럼 왕따를 당한다고 느낄까? 무시당한다는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게 될까?

왕따와 무시와 우열 의식의 발생 여부를 떠나서, 타문화로의 이민과 이주는 어떤 형태로든 충돌을 일으키고, 상대편 문화와 접목되기 위해 트랜스포머를 작동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트랜스포머를 영혼과 양심을 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자문화중심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진이 대니로 변신하는 것을 타문화중심주의나 양심 버리기로만 간주하면, 이분법적 우열 의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진에서 대니로 '변신'하고, 다시 대니에서 진으로 '변신의 변신'을 거칠 때 나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며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된다. 영혼 버리기는 변신의 변신 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찾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며, 변신을 통해 '회복된 진'은 '최초의 진'과 달리 '발전된 진'이 된다.

다문화주의 속에서 동등한 자아실현

나 의 본래적 자아, 본래적 문화는 나와 다른 문화적 인격을 찾아 변신을 거듭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을 전제하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문화를 찾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후자는 트랜스포머의 긍정성과 성장 과정의 소중함을 빛바래게 한다. 타문화 지향적 태도도, 자문화 지향적 태도도 모두 트랜스폼의 한 단계로 여기면서 자기 성장의 중요한 과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변신할 수밖에 없는 다문화 상황에서 다중인격을 통합적으로 반성할 때만이 중심이 우월하고 주변이 열등하다는 이분법이 깨지게 된다. 끝내는 모두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자각 속에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 자신이 타인이나 타문화에 함몰되지 않는 중심을 찾는 방법은 변신의 변신이며, 이로 인해 다문화주의 삶의 태도와 인정도 가능해진다.

다 문화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진은 현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동안 단일 민족을 고수하던 한국 사회에서도 이주 노동자와 이주 여성이 늘어나고 국제 결혼, 혼혈 2세의 초등학교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도 자아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진과 대니, 원숭이와 웨이첸 같은 트랜스포머를 견뎌내야 한다. 그런 견딤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인정이, 중심과 주변의 해체가, 정체성 형성의 자유로움과 상호 동등성이 실현될 것이다.
진 루엔 양(Gene Luen Yang)

만 화를 그리면서 동시에 고등학교에서 컴퓨터 공학을 가르치며, 한국인 아내,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1997년 <고든 야마모토와 괴짜 왕(Gordon Yamamoto and the King of the Geeks)>으로 미국 만화계의 권위 있는 제릭 재단(Xeric Foundation)의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진과 대니>로 전미문학상 최우수상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다. 전미문학상 57년 역사에서 만화가 최종 후에까지 오른 것은 역사상 최초였다. 전미도서관협회에서 수여하는 마이클 L 프린츠 상 또한 만화로서는 최초의 수상이었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샌프란시스코 만화예술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계 미국인인 데릭 커크 김(Derek Kirk Kim)과 공동 작품집을 준비 중이다.
/이정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원·연세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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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철학자의 서재 2011. 3. 28. 18:00
세계 리포트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서재]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기사입력 2008-09-26 오후 5:58:01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시장과 진보의 불행한 종말

책 을 두 번 읽었다. 처음 접했을 때는 황당했다. 숲속 오지에서의 '자급적' 삶, 노동과 고행, 기독교 근본주의, 아나키스트, 납세 거부, 현대의학 거부, 창조설 옹호, 시장과 '가격'(거래) 거부 등. 무슨 이야길 하려는 건가.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닌가. 하지만 그 충격으로 무언가 찜찜한 것이 남았고, 결국 다시 책을 들게 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학교 복지, 과학과 합리적 사고, 지속가능한 발전. 이는 현대 지성의 키워드요, 당연한 요청이다. 그런데 호이나키는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반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요소를 고발하며 홀로 외로이 '아니오!'라고 외친다. 더구나 시장과 화폐, 전기와 비행기, 진보와 연대 등 보통 사람이 당연시 하는 온갖 '근대적' 산물, 이념, 제도와 편의를 거부한다.

신 부와 교수의 경력도 던져버리고, 깊은 오지에서 '자족적' 농부로, 또 대학 식당의 '행복한' 청소부로, '길'을 찾는 순례자처럼 평생을 방랑한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책의 제목이 곧 그 자신의 모습이다. 책을 읽다 보면, 영화 <위트니스>에 등장하는 아미쉬 공동체, 혹은 선가(禪家)의 청빈한 삶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찾으라 한다. 미국의 불의와 문명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서도 먼저 가족, 나라, 신에 대한 충성(pietas), 그리고 덕(virtue)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성과 덕의 실천은 '육체 노동'과 절약, 자족적 농촌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학과 진보, 제도와 국가, 효율성과 시장 등 근대가 만든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요 환상이며, 오히려 빈곤과 부채, 억압과 불행, 전쟁과 제국주의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외로운 거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호이나키는 기독교 아나키스트인 셈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세상이 달라지냐고? 그는 "숲속의 생활"을 외치던 소로(H. D. Thoreau), 가톨릭노동운동의 선구자 헤나시(A. Hennacy)의 입을 빌어 선문답처럼 답한다. "맞아요! 하지만 세상의 불의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그는 국가의 불의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여 세금 납부도 거부한다. 악마적 시장 논리를 거부코자 자기 집을 시장 가격의 3분의 1에 내 준다. 학교도 병원도 복지도 심지어 장애인 시설도 신실한 삶에 독이 되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1960 년대 말, 서구사회에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 제국주의, 국가와 시장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 폭발한다. 대항문화(counter-culture)와 '대안적 삶'이 유행처럼 번진다.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 뉴레프트 학생 운동의 자극제가 되고, 다른 한편에선 히피와 마약, 신비주의와 '뉴에이지'가 확산된다. 동양적 지혜와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도 이때부터 이루어진다. 호이나키의 고뇌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이들 중 어느 것도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후에 등장한 "지속가능한 발전" 구상도 시장과 권력에 '타협'이라고 하여 이데올로기로 간주한다.

나를 바꾸는 삶!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나 는 이 책을 읽으며 윤구병을 떠올렸다. 대학에서 고전철학을 가르치던 윤구병은 어느 날 교수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간다. 도시에서 버림받은 아이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공부도 하는 공동체를 꾸린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성껏 일군 유기농 채소로 만든 밥을 '가격' 없이 제공한다. '형편에 따라' 돈 내는 식당을 연 것이다. 그에게는 꿈나무 어린이를 위한 희망의 책들을 내 올린 수익이 있었다. 하지만 윤구병은 이 수익 역시 '공금'이라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 쓴다.

세속에 물든 나로서는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형님"이다. 그의 친형(윤팔병)은 넝마를 수집하는 사람이다. 어렵게 1000만 원을 모은 어느 날 그는 그 돈을 어려운 북한 어린이 돕기에 쓰라고 이름 없이 신문사에 기탁한다. 본래는 전세금에 보태기로 아내와 약속한 돈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아내에게 대신 줄 장미 몇 송이를 들고, 술 힘을 빌려 집으로 갔단다. 잡지에서 본 그 기사 말미에 윤팔병이 말한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뭘 좀 한다고 애는 쓰는데, 먹물을 먹은 놈이라 아직 멀었어요."

그 윤구병은 오래 사귄 선배다. 게다가 그가 농사 짓는 변산은 나의 집에서 가깝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 진담 같은 농담(?) 때문에 나는 그 주변에서 그가 빚은 술만 먹었을 뿐 아직도 그 공동체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여기 오려면, 적어도 셋은 같이 와야 해, 또 최소한 사흘 이상 일 해야 하고. 그거 싫으면 오지 마!"

윤구병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호이나키를 본다. "나(호이나키)는 현대 사회의 실패자들이 겪는 매일 매일의 어려움에 동참하도록 도로시 데이를 이끌고 간 가없는 사랑의 불에 대하여 생각하고,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이 개척한 삶에 소박한 매력을 느끼며 (…) 현대 세계가 던져주는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웬델 베리의 비전이 반박할 수없는 논리라는 것을 느꼈다."

호이나키는 미국 일리노이 주 링컨의 시골에서 1928년 태어난다. 어린 시절 육체노동과 공작 일만 하던 할아버지의 삶, 반나절 우체부로 일하고 오후에는 말없이 농사만 짓던 아버지의 삶, 문명과 기술로부터 격리된 '초라한' 집안 분위기 등에 반발, 가출을 꿈꾼다. "해병대에 들어와 세계를 보라"는 광고에 현혹, 1946년 집을 떠나 미군으로 중국에 근무한다.

제대 군인에게 주는 혜택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의 자급적 농촌 공동체 삶에 대해 다시금 동경의 마음을 품고, 그 시절 부끄러워했던 농부차림의 아버지의 모습을 사모하게 된다. 1951년 도미니크회 수도회에 입단, 이후 15년간 수도사 생활을 한다. 1959년에는 뉴욕 맨해튼 빈민구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는데, 이때를 전후해 많은 정신적 지도자들을 만난다. 그 중 한명이 1930년대부터 피터 모린과 함께 미국 가톨릭노동자운동을 전개해온 도로시 데이(1897~1980)다.

데이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운동은 국가의 힘에 맞선 아나키스트적 비협력주의,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평화주의,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또 호이나키가 목격한 1950년대에는 주로 뉴욕의 부랑자들에게 수프를 끓여주는 일을 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실천인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목표로 했다.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움직이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코울즈의 지적에 대해 데이는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작은 공간'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답한다.

호이나키는 데이의 이런 삶에 감명을 받는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소비주의에 맞서 가난을 택했고, 기술주의적 추상화에 맞서서 이웃과의 친밀한 사귐을 택하고, 풍요와 성공을 구가하는 사회에 맞서서 남루한, 멸시당하는 자들 곁에 서있기를 택하였다."

길은 낮고 천한 곳에!

호이나키의 삶은 때로 종잡을 수 없다. 1960년대 초에는 남미 연구를 위해 푸에르토리코, 칠레, 멕시코 등을 여행하고, 1967년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대학(LA)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미국의 불의와 무질서에 분노하게 되고,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망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망명의 비겁함에 대해 자책하게 되고, 또 충성(pietas) 구현을 결심하면서 다시 귀국, 일리노이의 실험대학 생거먼(Sangaman) 대학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접한 몇 권의 책 역시 호이나키에게 감동을 준다.

그 중 하나가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인데, 호이나키는 이들의 삶을 통해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소비를 삼가며, 실제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자립의 덕행"을 배운다. 그리고 웬델 베리(1934~)의 책 <미국의 붕괴>를 통해서는 자급적 농업 공동체야말로 인간적 사회의의 유일한 가능성이란 확신을 하게 된다. 웬델은 아미쉬 공동체를 완전한 의미의 공동체로 간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몬느 베이유의 <뿌리를 찾아서>도 호이나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베이유는 파시즘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1932년 독일로 갔고, 1934년에는 노동자의 세계를 몸소 알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갔고, 1941년 농장 노동자의 피로(疲勞)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치기 위해서 포도밭의 일꾼이 되었다." 결국 호이나키는 베이유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다시 대학을 떠난다.

그로 하여금 대학을 떠나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교수노조 활동에 대한 환멸이었다. 생거먼 대학 옆에는 마더 존스(1837~1930)의 무덤이 있었다. 노동운동, 공동체 운동에 헌신했던 존스를 생각하며 호이나키는 노조 활동에 대해 수치심마저 느낀다. "사회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고액의 급료와 특권이 보장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인간적 삶의 구현에 대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그가 택하는 것은 일리노이 농촌에서의 농부 생활이다.

그 후 농사 일 내내 그를 사로잡은 정신은 중세 수도원의 기도와 노동, 그리고 절약과 '땅'(육체노동)이었다. 그리고 가족, 교회, 근면, 나눔과 베품이었다. 그러던 중, '약간의 생활고' 해결을 위해 인근 대학에 '부엌일꾼'으로 취직, 2년간 화장실 청소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하층민 사이에 섞여 말없이 사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또 시몬느 베이유의 육체 노동에 대한 헌신을 배우려 노력한다. 그는 그 2년이 너무도 행복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성스러운 산으로 순례의 길에 나설 수 있다. 이러한 중심은 흔히 사회의 '시궁창', 즉 내가 화장실의 비유 속에서 본 것과 같은 데서 발견된다 (…) 진정한 중심은 저 멀리 아래에, 사람의 필수적인 나날의 '천한 일'을 하는 육체적인 경험 속에 있다 (…) 중심은 어둡고, 천한,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에 감촉될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채우는 많은 사람 중에는 간디도 있다. 그는 인도 여행을 통해, 첫째 자급적 농업을 문화의 토대로 삼고, 둘째 필요한 것은 마을 규모에서 만들어내는 문화를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다시 한 번 감복한다.

하 지만 그는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다. 그를 시종일관 사로잡은 정신은 중세 수도원의 '기도와 고행', '청빈과 노동'이었다. 만약 그가 노자/장자, 불가의 생활이나 선(禪), 동양적 청빈과 자연친화 사상을 알았더라면 무어라 이야기 했을까. 아마도 동아시아에 답이 있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

책 의 마지막 장은 더욱 극적이다. 독일에 머물던 호이나키는, 어느 날 부시의 바그다드 폭격(1991년)이라는 충격에 접한다. 동료들과 일견 무력해 보이는 피켓 시위를 하면서 많은 자성(自省)을 쏟아낸다. 제국주의와 거대한 미국의 폭력 앞에 무력한 인간,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호이나키는 그 대답으로 '울고 있는 바보', '거룩한 거부자'의 삶을 제창한다. 그리고 그 거룩한 바보의 정신을 아나키즘에서 찾는다. 자유주의 경제의 풍요에 대해 깊고 크게 울리는 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아나키즘 말이다.

그 의 아나키즘은 독특하다. 근대 국가와 근대 경제마저 거부하는 윌리엄 골드윈과 소로 전통의 아나키즘인 것이다. "나는 사회에 대한 완전히 대안적인 비전을 가진 하나의 사회-정치철학으로서의 아나키즘에는 관심이 없다 (…) 그러한 행동은 모두 다양한 종류의 사회공학이 필요하고, 따라서 내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고, 또 내가 행사하고 싶지도 않은 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내가 먼저 나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지도 않고, '힘든 노동의 삶'을 살지 않고도,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고, 몸소 집 없는 사람과 거리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고도, 일관된 논리를 가진 위대한 아나키스트 이론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호이나키는 헤나시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서의 가르침에 직접 토대를 둔 이 네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기도와 단식이라는 전통적인 관습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한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과연 이런 삶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별종이고 도덕적으로 예민한 바보('거룩한' 바보)인가. '나'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나'를 찾는 삶으로서는 의미를 가질지언정, 그런 삶이 공동체와 사회의 문제, 지구적 문제의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희망을 구현하는 투쟁과 연대는 어떻게 하나. 책을 덮으면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주변에서 계속 던져지는 이런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스트 윤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고, 갈수록 더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다. 내가 이들 무수한 시스템을 변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시스템이 제공하는 외관상의 안락과 안전과 특권과 명예를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을 시작할 수는 있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혁명'이다.

사회적 대안은 사회과학적 진단과 처방, 진보와 연대를 통해서 마련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신념이 녹슬고 있다. 과연 그 '녹슬어 빈 곳'에 호이나키의 삶이 작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서유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호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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